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문단 편집) === 박종철의 사망 === 1986년 [[10.28 건국대학교 항쟁]] 진압 후 전두환 정권은 '반제동맹당 사건'과 [[마르크스-레닌주의당 결성기도 사건]] 등 공안조작 사건들을 발표하면서 공안정국을 조성했다. 사건 발생 전날인 1987년 1월 13일 [[김종호(1935)|김종호]] [[행정안전부장관|내무부장관]]은 [[대공분실|남영동 대공분실]]을 격려 방문하여 당시 진행 중이던 공안사건 수사에 속도를 내도록 압박했고 1월 14일 경찰은 피해자 [[박종철]]을 남영동 대공분실로 연행했다.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1985년 10월 [[서울대학교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된 [[박종운(1961)|박종운]][* 당시 [[서울대학교|서울대]] 민민투 위원으로 수배 중이던 1986년 11월 23일에 박종철 군의 하숙집에서 하룻밤을 묵었고 사건 엿새 전인 1987년 1월 8일에 다른 동료와의 연락을 부탁하기 위해 박종철의 하숙집을 다시 찾았다. 경찰은 박종운을 주모자로 지목하고 각종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그를 체포하기 위해 이를 알고 박종철을 연행했다.]의 소재를 추궁했고 박종철은 모른다고 했다. 이에 수사관들은 박종철의 옷을 모두 벗기고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로 끌고 가 물고문을 반복했다. 그래도 모른다고 하자 결박당한 두 다리를 들어올려 또 다시 물고문을 가했고 고문 도중 욕조의 턱에 목 부분이 눌리면서 결국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으로 인해 의식을 잃었다. 경찰 측이 부랴부랴 [[중앙대학교병원|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의 [[오연상|의사]]를 불러 심폐소생술을 시도했는데 의사의 언론 증언에 의하면 "사건 현장에 물이 흥건했다"고 한다. 수사관들은 박종철을 대공분실 부근의 용산 중앙대학교병원으로 이송하려고 시도했지만 박종철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사망을 최초 확인한 오연상 당시 중앙대학교 부속 용산병원 내분비내과 전임강사가[* <선을 넘는 녀석들> 방영 당시 [[중앙대학교병원]]에서 퇴직해 근처 개인병원 운영 중이다.] [[선을 넘는 녀석들]]에서 회고하기를 "당시 우연찮게도 왕진이 가능한 내과의사는 나뿐이었고, 박종철은 (그러지 않고서야 왕진 요청이 올 일이 없었기에) 우연의 일치로 왕진 요청 전에는 살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정황상 불필요한 [[가혹행위]]가 있음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태였지만 일단 바로 사망 선고를 내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심폐소생술을 약 1시간 동안 진행했고 이후 경찰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으로 가자"고 했다. 이에 오연상은 '용산병원으로 가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형사들에게 "미리 준비를 위해 [[응급실]]에 전화해야 한다"고 말했고 경황이 없던 수사관들은 그냥 전화를 허락했다. 오연상은 응급실에 전화하여 "이 환자는 병원으로 가면 안 된다, 응급실장이 막아달라"고 전했고 응급실장 뿐 아니라 당시 중앙대학교 용산병원장 진료부장 등이 총동원되어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는 병원의 규정을 동원해 박종철의 시신의 내원을 막아 시신은 [[국립경찰병원]]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고문치사 사건이 [[의료사고]]로 둔갑하여 은폐될 뻔할 수도 있었던 국면이었다.[* 오연상 의사는 당시 상황이 급박하여 병원 응급실에서라면 살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응급실로 가자고 했던 것 같지만 후일 윗선에서 중앙대병원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일이 일어날 수 있었다.] 형사들은 오연상에게 "사망진단서를 써 달라"고 했지만 오연상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사망진단서]] 대신 [[사체검안서]]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때 "환자의 사인을 모르기에 미상으로 썼고 부검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말했는데 경찰은 받아들였다. 이후 이 사실을 [[동아일보]] 기자 윤상삼에게 전달하였고 오연상은 검찰에서 조사는 많이 받았으나 이미 신군부와 대공분실의 손을 떠났기에 그들은 오연상에게 손을 댈 수 없었고 이 틈을 노린 오연상은 휴가를 내고 잠적했다. 경찰은 박종철이 병원에서 숨진 것으로 조작하려고 했으나 [[중앙일보]] 서울지검 출입기자 [[신성호(기자)|신성호]]가 소식을 듣고 곧바로 데스크에 보고하여 그날 2단짜리 꼭지에 기사가 들어갔다.[* 현재 신문은 5단 체계다.] 이날 기사는 "학생이 남영동에서 죽었다"는 단신이었고 1면도 아니고 사회면 한구석에 있었는데 석간 강판 이후 신문이 배포되자 모든 신문사에서 중앙일보에 전화를 걸어 진위를 물었다.[* 지금도 강판 시 나오는 신문은 다른 신문사에도 배달된다.] 이후 문공부는 중앙일보에 난입하여 깽판을 치고 갔다. 이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5.18 민주화운동]] 7주기 기념 [[미사]]에서 내막을 폭로하는 바람에 은폐는 무위로 돌아갔고 파문이 확산될 것을 우려한 경찰에서는 서둘러 조한경, 강진규 2명이 박종철을 취조하던 중 사망했다고 이 사건에 관하여 축소 은폐 보도를 하였다. 그러고는 증거를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신을 화장하려고 [[서울지방검찰청]]에 시신 화장 신청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가해자들은 '''조한경, 강진규, 황정웅, 반금곤, 이정호''' 5명이다. 왼쪽 팔을 황정웅, 오른쪽 팔을 반금곤, 다리는 강진규가 잡았고 이정호가 박종철의 머리를 욕조에 담갔으며 조한경은 고문을 지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